단상. 십자가의 삶

 고국을 방문중인 기자의 눈에 띤 어느 교회의 사순절 슬로건이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까’ 여전히 목돌림이 불편한 가운데 지나가는 차창을 통해 읽어낸 현수막의 내용이다.               

 

예수님처럼 살자는 것인지 말자는 것인지…그러면서 문득 드는 생각하나, “만일 저 표어가 겸손을 가장한 것이라면…”

겉으로 드러난 표현 뒤에 감추어진 본래의 의미는 예수의 영광에는 동참할 수 있지만 예수의 십자가에는 동참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닌가. 더 나아가면 예수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무조건 거룩하고 무조건 옳으시고 무조건 찬양의 대상이 되기에 따라서 우리는 흉내 낼 수 도 없거니와 흉내 내려고 해서도 안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다 보니 예수는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늘날 모든 기독교인들이 떠받드는 교주, 우상이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부여해 교계가 사순절 지키기에 사력을 다하고있다. 요란하게 치장한 십자가를 만들어 강단을 장식하는가 하면 교인들 마다 십자가를 목에 걸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살아보겠다며 주문과 같은 기도를 반복하고 있는 등 저마다 열심이다. 

 

그러나 명심하자. 십자가의 삶은 마치 주문과 같은 반복되는 기도를 통해 내 삶의 모습을 거룩함의 모습으로 위장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성품을 바꾸고 인격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나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가느냐 애굽에 머무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라면 광야에서 놋뱀을 든 사건은 우리가 애굽을 빠져나와 가나안으로 가다가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과 간음으로 망하느냐 아니면 계속 가나안으로 가느냐를 가늠하는 사건이다. 즉 두 사건 모두 가나안으로 가는 삶이 없다면 헛것이라는 의미이다.  

 

십자가의 삶은 오직 애굽을 버릴 때만 가능한 가나안을 향하는 삶이다. 먹고 마시는 문제를 초월해 굶더라도 자유가 좋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고 자유로움만으로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랑을 노래하는 무대이다. 애굽이 빵을 먹고 사는 세상이라면 가나안은 말씀을 먹고 사는 곳이며 애굽이 에덴동산을 쫓겨난 아담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경작하는 삶이라면 가나안은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이 에덴동산을 경작하는 삶이다. 

 

십자가의 삶은 흉내 낸다고 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흉내 내려고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별주부전에 나오는 토끼가 자신의 간을 빼놓고 다닌다는 기발한 재치로 용왕을 속이고 사지를 벗어난다는 얘기는 우리 모두가 웃어줄 수 있는 얘기지만 십자가를 편의에 따라 걸었다 놓았다 하는 우리들의 삶보다 더 큰 넌센스는 없을 듯 싶다. 그런 십자가는 감사도 은혜도 아니고 다만 하나님께서 그토록 경계하라고 하신 우상일 뿐이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음을 선언한 바 있다. (갈6:17) 예수의 흔적이 무엇이었겠는가. 사도 바울의 몸에 있었던 예수의 흔적이란 다름아닌 예수의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삶은 이미 이전의 사울은 죽고 그리스도만 살아있는 삶이었던 것이다. 바울의 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셨기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삶을 살 수 있었는데 이것이 결국에는 기독교인들이 돌아가야 할 종착지로서의 십자가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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