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화해 (하크네시야교회 사태를 다루면서...)

July 27, 2017


임성식 목사 (발행인. 대표)


기사로 다뤄지기 전, 침침한 눈에 핏발 세워가며 쓴 12번의 칼럼을 제외하고 정식 기사로 취급한 지가 벌써 1개월하고 5일 째, 이젠 주변에서 얘기들이 그만하고 '용서하라'는 말과 '화해'를 시켜 봄이 어떠냐는 의견들이 간간이 들려오고 소위 카톡에서도 '용서와 화해'라는 말이 자주 오르내린다. 아마도 대승적 차원(이 말이 여기서 어울리는 지는 모르지만)에서 서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는 말일게다.

하긴 누구의 말처럼 "모든 사회가 지난 일에 대한 정죄와 판단으로 날밤을 지새운다면 과연 생산적이겠냐"는 말도 분명 일리가 있기도하다. 그러나 용서와 화해에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일이 있다. 무엇을 용서하자는 것이며, 누구와 화해하자는 것인가가 그것이다. 용서할 사람이 제 아무리 용서하고 화해하여 더불어 살고자 하더라도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 잘못한 게 없다며 악을 쓰고 덤비는 데 용서는 무슨 말이며 또 화해는 또 무슨 말인가.

아직도 강단에서 분간 못하는 세치 혀로 무고한 사람들을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죽이면서 이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한 정당방위라는 식으로 말하며 그릇된 사실 앞에서 "그건 잘못된 게 아니라"며 단순한 몇몇 인사들 앞세워 폭력을 부추키는 강변을 하고, 무엇보다 그들 스스로가 더불어 화해할 마음이 없이 대책없이 덤비는데 한쪽에서만 '화해합시다' 한데서 이게 해결 될 문제인가 말이다.

진정한 용서는 먼저 잘못한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잘못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 더불어 화해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덮어두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잘못은 잘못으로 나타나야 하고, 더러움은 더러움으로 드러나야 하며, 또한 우리 모두는 그 아픔과 그 부끄러움을 직시해야한다.

그러나 지금 하크네시야교회에는 용서해 줄 사람만 있고, 용서 받을 사람은 없으며, 거꾸로 누군가를 손 좀 보겠다는 사람들만 있고, 자기 잘못 때문이라며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다 억울하고 모두 다 분한 사람들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진정한 용서가 있을 수 없다.
있다면 그냥 덮어둠이 있을뿐이며 또 있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이 있을뿐이다.

꾸중을 하는 사람을 향해 "나도 가장 큰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라며 "그러니 당신들도 참아라"는 말도 그렇다. 바가지 하나 깨진것도 피해라고, 집이 통째로 날아갈 위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용서합시다" 하는 격이다. 온통 말이 안되는 것 뿐이다. 적어도 아직은...

용서와 화해를 통한 새 출발은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이 서슬이 시퍼런 바리새인과 서기관 가운데서 돌에 맞아 죽기를 기다리 듯,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고 그렇게 죽음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죄없는 자가 돌로치라"는 예수의 말은 '그러니 우리 모두 용서합시다' 따위가 아니다. '당신도 죄가 있으면 간음한 여자 옆에 앉으라는 말이고 그리고 돌에 맞으라는 말이다. 그렇게 '나 편하자'는 식으로 성경을 보니 오늘날 이 모양 이 꼴이 아닌가! 도대체 언제 하크네시야에는 이런 애통이 찾아올런지...
그저 가슴 답답한 7월이 이처럼 속절없이 지나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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