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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 생각하기


자연과학과 진화론적 사고에 대한 변증 (1)

과학적인 연구와 발견으로 하나님의 세계가 ‘분석’은 되지만 ‘해석’은 안 된다. ‘분석’은 해체적이고 요소적이기 때문에 어떤 세계를 나누어서 그 구성요소를 발견하고 구성을 밝히지만 그 세계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해석’은 존재에 관한 인간 시각적 차원이고, 사람의 인식적 차원이지만, ‘분석’은 존재를 분석하는 도구에 따른 탈시각적 차원이고, 초관념적 차원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현미경을 통하여 미시적으로 보거나 망원경을 통하여 거시적으로 보고 분석하더라도 보는 도구의 발달에 따라서 그 모습이 다르게 보이며, 본 것을 분석을 하더라도 인간이 체험할 수 없는 시각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인간 경험을 통한 재해석이나 기존 관념을 통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피상적으로만 이해 할 수가 있다.

심장을 해부하고 피의 성분을 분석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통하여 인간의 생명력을 발견할 수는 없다. 두뇌를 파헤쳐서 구조를 분석하고 성분을 조사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생각을 밝혀낼 수는 없는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에 대하여서도 분석을 통해서 그 대상의 본질을 다 알 수가 없는 것이 과학적인 접근이다. 더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분석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적인 연구로는 영적인 세계를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모두 분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은 단지 하나님의 세계 중에 보이는 물질적인 세계에 대한 분석으로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과 그 결과에 감탄할 수 있는 근거들을 발견할 뿐인 것이다.

그리고 진화(evolution)란 용어는 본래 ‘두루마리를 펴는 것’이라는 뜻으로,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생물학의 용어로서도 처음에는 개체의 발생(발육, 성장, 전형)의 과정에 쓰였던 말인데, 그 과정이 두루마리를 펴는 것과 같은 과정이라는 생각(전성설[preformation theory] : 개체 발생에 있어서 완성된 개체 개개의 형태, 구조가 미리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그것이 후에 전개되는 것이라고 보는 설)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발전적인 의미를 갖는 변화에 대한 표현으로는 ‘진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당하지 못하다. ‘진화한다’는 것은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뿐만 아니라 나쁜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에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화론을 확립한 찰스 다윈(Charles Darwin)도 ‘진화’를 “변화를 따르는 유래”라고 했고, 생물의 계통성에 주안점으로 새로운 종이 형성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언급한 것이다. 생물체의 어떤 기관은 퇴화하는 현상도 있는데 이것도 진화의 일면이기 때문에 ‘퇴화’가 진화의 반의어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는 넓은 의미로 ‘발전’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거나 혁명에 대한 ‘점진적 변화’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존재의 변화하는 흐름”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진화’라는 표현은 단순히 생물학적 분야에서만 언급되는 단어가 아니다. ‘진화론적 이해’와 관련해서 생물의 기원, 물리화학적 반응, 우주 형성 이론 등에 관한 자연과학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해석이나 각종 사회적 현상의 변화를 이해하는 사회과학적 사상에서도 전용되고 있는 사고(思考)의 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라는 용어는 ‘변화 혹은 변천하는 모든 것에 대한 자연적인 이해 방법’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진화론적인 접근은 인간이 생각하고 볼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원리를 발견하기 위하여 귀납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진화론적 접근의 대상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실존적인 존재’이며, 그 이해의 중심에는 ‘인간적인 이해’가 자리 잡고 있다.

한편 ‘창조’라는 용어도 단순히 인간과 우주만물의 발생 원리에 관한 기독교적인 이해에 국한하여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 ‘창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곳은 ‘새로운 것이면서 발전적이거나 획기적인 것’에 대하여 붙이게 되는 단어인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으로나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방법이나 사고 혹은 사상의 전환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는 없었던 방법이나 존재 혹은 개념이 생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관성이 있거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과정에 대하여서는 ‘진화’나 ‘창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상반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적대적인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특정한 존재나 시스템 혹은 세계의 변화에 대한 원인이나 동인을 밝히는 경우에는 ‘진화’와 ‘창조’가 상반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진화론적인 접근’은 변화를 ‘자연 발생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고, ‘창조론적인 접근’은 변화를 ‘의도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론적인 접근은 상태나 모습의 변화를 예측하는 창의성이나 의도가 존재하는 것이고, 진화론적인 접근은 그 변화를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진화론적인 접근은 변화를 예측할 수가 없으므로 연역적인 이해가 불가능하나 창조론적인 접근은 창조자가 존재하며 그 변화의 방향을 연역적으로 접근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창조자가 존재하고 그의 의도에 따라서 세계가 돌아간다면 세상의 모든 일들은 귀납적인 방법으로 추구하는 진화론적 방법이나 연역적으로 이해하는 창조론적 접근이 올바른 접근이었다면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창조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연역적인 방법이나 귀납적인 방법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며 아무도 미래를 예견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방향을 맞출 확률은 극히 낮게 될 것이다. 만일 예측이 맞더라도 결과가 이루어진 후에야 확인할 수가 있을 뿐이며 예비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은 『성경적 세계관: 성경대로 생각하기』(서성환 지음, CLC[기독교문서선교회] 출간)을 참조하기 바란다. 저서 정보 http://www.clcbook.com/?c=8/9&mod=shop&cat=3&p=1&sort=gid&orderby=asc&recnum=20&uid=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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