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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의 복과 사람의 안식 ①


1. 피조물에 주신 복의 의미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오복이라고 하는 것은 오래 사는 것(長壽), 부유한 것(富貴), 건강(健康), 좋은 덕을 쌓는 것(攸好德), 그리고 편안히 죽는 것(考終命)을 의미한다. 기독교에서도 복에 관한 것과 복 받는 길을 가르치고 있는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복’도 이런 복일까? 예수님을 믿으면 건강하게 오래 살고, 부자가 되며, 땅에서도 범사가 잘되고, 죽어서도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성경에서 언급한 복일까?

많은 목사님들이 설교에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잘 믿은 사람이 받은 복에 대하여 언급하는 내용은 세상적인 복과 동일한 것을 언급할 때에는 성경말씀이 왜곡되는 느낌이 들어서 가슴이 아프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받기 원한다. 그래서 복을 준다고 하면 어떤 종류의 일이라도 하려고 하다 보니, 미신적인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복 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으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하여 그 종교가 가르치는 도리를 따라 행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에서도 복에 대한 것과 복 받는 길을 가르치고 있다.

만일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복이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이 추구하는 복과 같은 의미라면 미신적인 행동을 통하여 복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잘못이라고 말 할 수가 없을 것이며, 다른 종교에서 얻게 되는 복과 기독교에서의 복이 같다면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종교의 통합이나 교류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이비 기독교나 이단들은 물론이고 건전한 교단에 소속된 교회마저도 샤머니즘적인 기복(祈福)신앙으로 흐르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복에 대한 개념’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복이며,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복인지, 그리고 왜 천국 가는 것이 복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와 명예와 권세를 누리는 세상적인 복은 어떤 의미가 있는 지, 또한 그리스도인이 천국에 가서 누리는 복인 영원한 안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1) 하나님이 주신 복의 대상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조성하시는 가운데 피조물에 대하여 ‘복을 주신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물고기들과 새들을 창조하신 후에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내용이 처음으로 기록되고 있다(창 1:20-22). 땅의 짐승을 만드실 때에는 복을 주셨다는 표현이 없으나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또 다시 복을 주셨다(창 1:27-28). 그런데 새와 물고기 그리고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표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의 창조와 만물의 조성을 마치신 후에 ‘일곱째 날’에 대해서도 복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2:2-3).

그런데 대부분의 해석자들이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타나는 ‘복을 주신다’라는 말에서 ‘복’의 내용을 이해함에 있어서, ‘복을 주시며’라는 말에 이어지는 표현을 복의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물고기와 새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언급한 후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물고기들과 새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게 되는 것’이 곧 ‘복’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사람에게 주어진 복도 “복을 주시며”라는 표현에 이어지는 내용을 복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하여서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는 것’이나 더 나아가서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것’을 복이라고 말한다. 일곱째 날의 복에 대한 의미에서도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라는 표현에 이어지는 말씀인 ‘거룩하게 하심’을 복의 내용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구별하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서 ‘다른 날들과 구별하셨다’고 해석한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안식하시니라’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후대에 사람들이 지키게 될 안식일의 근본적인 의미로 이해하여서 안식일에 받게 되는 사람들의 복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복’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대해서 몇 가지의 의문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복 주시며’라는 말 다음에 이어지는 표현이 구체적인 ‘복’의 내용이라면 ‘복을 주시며’라는 표현을 언급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만일 ‘복 주시며’라는 표현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복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라면 ‘복 주시며’라는 표현은 불필요한 언급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하고(딤전 4:4) 만드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주신 질서나 명하신 사명이 모두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복’이라는 표현은 특별한 의미가 없는 단어가 되고, 별도로 ‘복을 주신다.’는 언급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둘째, 만일 물고기와 새 및 사람에게 언급하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게 되는 것’을 ‘복’이라고 한다면, 자녀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나 어떤 일이 잘 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새끼를 많이 낳지 못하는 동물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의미가 되는가?

이런 ‘생육’이나 ‘번성’이 복이라면 오늘날에도 ‘자녀가 많아서 큰 가족을 이룬 사람’이나 ‘사업이 잘되어서 부유한 사람’ 및 ‘권력을 누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는 관계없이 복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의 복이 세상적인 복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자식을 많이 낳는 사람들은 복을 더 많이 받은 것이 되고, 땅을 정복하여 활용하는 개발이나 문명을 위한 건설이 복 받은 결과이며, 인간이 동물들을 마음대로 사육하고, 유전자 변형을 통해서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거나 인간의 만족을 위해서 이용하더라도 그것을 복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언급된 복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적인 개념과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일곱째 날을 구별하여 복을 주셨다고 한다면 만물을 조성한 6일간을 비롯한 다른 날들은 복된 날이 아니라는 의미인가?

만일 사람(아담과 여자)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인간 타락 이전에도 안식일의 개념으로 일곱째 날을 복 받은 날로 언급한 것이라고 본다면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내용(창 3:16-19)이 복에 반대의 개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이 죄를 범한 이후의 삶이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의 생활을 복된 삶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있다(창 3:18-19, 23, cf. 말 2:2, 롬 5:12). 그렇기 때문에 반복적인 일곱째 날의 안식과 복은 사람의 범죄와 타락이후에 생긴 의미인 것이다.

넷째, 여호와 앞을 떠난 가인의 후예들의 삶과 노아 시대에 홍수로 멸망당한 사람들을 볼 때에 단순히 ‘땅의 정복’이나 ‘생육 번성’이 복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도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홍수로 멸하신 것을 보면 단순히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만이 복이 아님을 알 수 있다(창 6장). 더욱이 살인하고 여호와 앞을 떠난 가인의 자손들이 땅을 정복하고 성을 쌓음으로써 문명의 삶을 시작하였으나(창 4:16-24) 그들이 복 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의 조성 시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언급하신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분명히 의도적으로 ‘새와 물고기’, ‘사람’ 그리고 ‘일곱째 날’에 대하여 복을 주셨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표현이 능동, 강의(强意)형(피엘형)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을 주신다.’는 말에 관심을 갖지 않고 간과(看過)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물을 조성하시는 목적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모든 피조물에게 주신 내용이 아닐 뿐더러, 이때가 인간의 범죄 이전의 상황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은 『성경적 세계관: 성경대로 생각하기』(서성환 지음, CLC[기독교문서선교회] 출간)을 참조하기 바란다. 저서 정보 http://www.clcbook.com/?c=8/9&mod=shop&cat=3&p=1&sort=gid&orderby=asc&recnum=20&uid=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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