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仰과 理性
우리 일반 기독교인들의 인식 속에는 믿음과 이성이 서로 적대관계로 놓여 있는 듯하다. 흔희 믿으면 된다는 논리 속에는 철저히 이성적인 것은 불신앙의 소치라는 전제가 강하게 담겨져 있다. 그러한 것으로 겪게 되는 낭패는 흔하게 볼 수 있다. 억지 같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교회에서 차량을 구입했다. 그 교회 목회자는 아주 믿음이 좋은 목사라고 자칭한다. 차량을 구입하게 되면 일반적으로 불의의 사고를 대비해 보험을 드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그 목사의 신앙으로는 보험을 든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는 믿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요 불신앙의 소치로 밖엔 도무지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의견들은 이런 믿음의 논리에 눌려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차량을 운행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런 사고가 없었어야 하는데 언젠가 여름 수련회를 마치고 교인들이 돌아오는 길에 추돌사고를 빚게 되었고 많은 교인들이 사고로 다치게 되었다. 물론 한 예를 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의 논리는 어떻게 된 것이며 그 역할은 무엇인가.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러한 믿음의 논리는 여기서도 다시 빠르게 작용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실 목적으로 그러한 어려움을 주셨다는 새로운 믿음의 논리가 작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 에 사고를 대비한 제반 안전장치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믿음의 논리는 살며시 덮어버리고 새로운 믿음의 논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속임은 계속해서 그 자리를 유지한다.
이 경우 무엇이 문제인가. 믿음의 논리 속에서 아주 이성적인 논리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고 다만 맹목만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고 품고 있는 믿음과 이성과의 적나라한 관계이다. 과연 실제로 지성과 신앙은 서로 대치될 수밖에 없는가? 지성과 계시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저마다 견해가 다르겠지만 나로서는 지성과 신앙(믿음)이 서로 상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이들의 갈등구조는 해결이 불가능 할런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피스티스>와 <그노시스>의 잘못된 이해에서의 출발, 믿음이라는 것과 앎이라는 것이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우리들의 잘못된 이중구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성경은 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여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벧전 2:12)
여기서 이성 없는 자들을 짐승이라고 말한다. ‘이성없는’ 이라는 헬라어 원문은 <알로고스>이다. 알다시피 <로고스>라는 말은 원래 ‘말씀’ 혹은 ‘이성’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 부정접두어 알파가 접두되어 <이성 없는 자>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성 없는 자 같이 행동하는 이들의 행동 양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까지도 훼방하는 부류들이다. 유다서의 말씀이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 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 하느니라" (유10)
지성이 배제된 채 본능으로 아는 것에 대해서 물과 불을 가릴 줄 모르는 이들에 대해 짐승과 동일시하고 있다. 동시에 그 본능으로 아는 것과 함께 망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성이 배제된 신앙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헛된 도식이 신앙인들과 많은 지성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새해 들어 새벽기도를 가시던 老권사님께서 뺑소니차에 치여 소천 하셨다는 사건이 지역 일간지 1면에 나와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 이를 바라보는 일부 목회자들의 일명 빵집 토론(?)에서귀동냥으로 들은 믿음에 대한 논리는 더욱 可觀이라 그 씁쓸함이 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