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 믿는다는 것

 

외형이란 것은 내면의 진실을 반영해야 한다. 그게 진짜다. 자연 만물은 언제나 그의 외모와 내면의 삶이 일치한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것은 콩의 내면에는 콩의 진실이 담겨 있고 팥의 내면에는 팥의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들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일이 너무나 많다.

 

외모는 평화의 일꾼이지만 실제는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로는 민주주의의 영웅이지만 그의 삶은 독재로 단련되어 있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아니,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들은 누구나 그의 내면의 모습이 그대로 외모에 나타나지 않는다.   속에는 이리가 들어있어도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으며(마 7:15), 마음으로는 도둑질이라도 해서 더욱 더 소유하고 싶지만 겉으로는 구제와 자비를 외치는 것이 사람의 모습이다.

  

과연 우리들의 삶 속에 <신앙>이란 것이 있으면서 <신앙생활>이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신앙의 본체는 없으면서 그 껍데기만 뒤집어 쓰고 있는지…

물론 우리들 자신이 개나 돼지같은 존재라면 이런 점검이 필요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개나 돼지는 도대체 겉 다르고 속 다를 능력이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겉과 속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들이기에 스스로를 돌이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헌금을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 수 많은 <믿음의 행위>들이 참으로 우리속에 있는 <믿음>이 나타난 모습이라면 아름다운 것일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아니함만도 못한 것인데.

 

믿음이 내면이라면 믿는다는 것은 외형이다. 믿음이 실체라면 믿는다는 것은 그 실체의 나타남이요, 믿음이 명사라면 믿는다는 것은 동사이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해서는 아니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속과 상관없이 겉을 꾸밀 수 있기 때문에 믿음이 없으면서도 얼마든지 믿을 수 있다.
이때 대개의 경우 우리 속에 믿음이 없으면 없을수록 겉으로 표현되는 믿음은 강력하고 화려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이런 포장된 <아름다운 가짜>에 모두 속아 넘어간다는 점이다. 자신도 속고 주변 사람도 속고, 믿는 사람도 속고 믿지 않는 사람도 속는다.

 

결국 이 <믿음> 없이 존재하는 <믿는다는 것>만이 남아 믿음을 대신하고 믿음을 축출한다. 그레샴이라는 사람이 말한 것처럼 악화가 양화를 쫓아내는 법칙은 이곳에도 적용되어 믿음은 믿는다는 것에 의하여 수도 없이 쫓겨나고 버림당한다.

예수께서도 살아생전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조심하고 스스로 조심하라고 많이 말씀하신 뜻이 여기에 있다. 예수를 믿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고 해서 곧 믿음이 그의 소유가 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았다고 해서 곧바로 믿는 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믿음이라면 실제로 자신의 삶이 그러할 때 비로소 그는 믿는 사람,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된다.

 

하나님은 드러난 외형보다 감추어진 중심을 보신다고 성경이 그랬다(갈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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