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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표절 불명예 이후 교회 차린(?) 이규섭 목사 - 표절 관련 황당한 변명은 방어적 교만함의 극치


설교표절로 퀸즈한인교회를 불명예 퇴진하고 지난 9월 초 <제자삼는 교회>를 개척한 이규섭 목사가 최근 로컬지역 기자들에게 본인의 설교 표절에 대한 다소 황당한 입장을 밝혀 파문을 더해주고 있다. 내용인 즉 본인의 설교표절의 이유는 감당할 수 없는 업무 폭주와 자신의 나태함이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교계앞에 사과의 뜻을 전했으나 표절에 대한 교회와 교인들의 자세에 대해서는 <인민재판>이라는 다소 황당한 표현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발언을 해 이후 교회와 교계의 반응에 대해 귀추가 주목된다.

먼저 이목사는 표절과 관련해 “변명의 여지가 없이 설교 표절은 제가 인정을 할 수밖에 없다. 1차적으로 내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제가 기를 쓰고 한 주에 14편에도 준비했어야 했으며, 능력이 없으면 부목사와 나누어야 했다. 교인들이 저의 설교를 듣고 싶어 한다는 생각에, 혹시 교인들이 덜 올까봐 욕심을 낸 것은 사실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에 지적하는 것은 맞다. 제가 게을렀고 좀 더 성실히 설교를 준비했어야 했다. 교계에도 미안하다.”

여기까지는 이 목사의 입장을 이해하기로 하자. 그러나 이어지는 이 목사의 발언은 자신을 향한 교회와 교인들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인민재판 식이었다고 말하고 과연 전문적인 신학 지식이 없는 평신도들이 설교 표절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는데 이 과정에서 이 목사는 설교의 양이 늘어난 가운데 설교표절이 있었지만, 신학교 동기들과 스터디 그룹을 통해 주고받은 설교는 공동 작업이고 선물이라고 생각하기에 설교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다소 엉뚱한 말로 자신을 숨긴다.

“설교의 양이 늘어났다. 금식성회를 한 주간은 고난 주간이었다. 1월에는 안 그랬는데 4월에는 고난주간과 겹치니 한 주에 14편의 설교를 하게 되었다. 준비해야 할 설교의 양이 많아졌다. 설교자들이 다 그렇지만 컴퓨터 안에 책이나 인터넷을 읽다가 설교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저장을 해놓는다. 오랫동안 저장하여 양이 엄청나게 많다. 설교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면 그 내용들을 쭉 읽어본다. 그런데 인용을 했다고 안 밝힌 것이 실수한 것이다. 부활절 특별새벽기도회를 할 때 설교가 외부로 안 나가니 새벽설교를 가볍게 여긴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다음 주일설교는 사실 표절이 아니다. 한국에 신학교 동기들이 10여명 스터디 그룹이 있다. 워낙 설교준비가 힘드니 인터넷으로 이메일로 설교를 서로 주고받는다. 당시 너무 바쁘니 보내준 설교를 2-3시간 들여 제목설교식에서 본문강의식으로 제 스타일로 바꾸어 설교했다.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 설교는 친구끼리 공동 작업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죄의식이 없다. 서로 선물로 주고받았다.”

변명이 너무 유치하다. 본인 스스로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경건에 이르는 연습>(딤전4:7)에 대한 노력의 흔적은 없고 얼핏 들으면 본인은 교인들에게 설교를 위해서 자기의 직업에 충실하게 했다는 의미로 이해되고 이전 기사에서도 언급했듯이 지인들과의 관계를 언급하며 뒤로 숨기를 서슴치 않고 있다. 아마도 고질적인 병인듯 싶다. 과연 이같은 궁색한 변명을 듣고 자신을 이해해 줄 성도나 목회자, 교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오히려 교계 앞에 사과한다는 말을 무색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어서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인민재판 하듯이 설교표절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교인들이 감히 설교표절을 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목사가 싫으면 표절로 시비를 걸 수 있기에 교단적으로 설교표절에 대한 가이드 라인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만약에 표절 논쟁을 하려면 설교자들이 이야기해야 한다. 성도나 외곽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법원에 가면 증인이 이야기하는 것이나 방청객이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법을 전공한 변호사나 검사가 이야기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처럼 설교에 대해서도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판단해야하는 것이지 지금처럼 인민재판 하듯이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교인들이 감히 설교표절을 논할 수 없다. 만약 설교표절을 논하려면 최소한 아무리 적어도 목회자는 되어야 한다.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한 사람이 설교표절이 어디까지 표절이고 어디까지는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총회에서 설교표절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가 싫으면 난데없이 표절로 걸을 수 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안되니 최소한 설교표절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교단적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들이 있다.”

결국 본인의 설교표절에 대해서 자격없는 자들이 함부로 떠들지 말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자신은 당당하다는 느낌이 들어 그간 본인의 말대로 당했던 <쪽팔림> (이 단어도 이규섭목사가 설교시 강단에서 교인들과 주고 받으며 웃고 자위하던 단어였다)이 어느정도 만회됐다고 생각할 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교인과 목회자라는 구분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을 혼돈시키는 이분법적 사고를 통해 목회자와 소위 말하는 평신도(이 단어도 분명 잘못된 한국교회의 산물이지만 이해를 돕기위해 그대로 사용한다)의 상호 관계적인 면을 여지없이 뭉개버리는 악수를 두게 되는데 이같은 그의 발언은 가깝게는 본인이 불러모은 교인들은 어떤 경우도 앞으로 표절에 대한 얘기는 하지도 말라는 의미가 되고 객관적인 측면에서는 <자기 방어적 교만함>이라는 표현외에는 달리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가 않는다.

작금의 이규섭 목사의 행태를 보면서 언젠가 인간들의 욕심에 대해 썼던 글이 문득 떠올라 몇자 적어본다.

"욕심있는 인간들은 산에 오르면 내려오기를 거부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도 부인이 이해해 주길 바라고 밤새 술 처먹고 다음날 속이 멀쩡하기를 바라고 악한 짓은 골라하면서도 선하다 칭함 받고자하고 나쁜 일 뒤에는 좋은 일이 오겠지 자위하면서 좋은 일 뒤에 나쁜 일이 올 수 있다는 것은 생각도 아니하고" ...자,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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