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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볼륨을 조절할 줄 아는 세례 요한 "


적을 만났을 때 크고 강하게 보이려는 생각은, 대부분 동물들의 본능이다. 개구리는 뱀 같은 상대를 만나면 몸에 바람을 넣어 부풀려서 상대를 위협하며, 원숭이 중에 ‘황제 티마린’이라는 종이 있는데 멋진 수염이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뜨리고 위엄을 잡는다. 그런데 사람도 동물 못지 않은 것이, 조금이라도 남 보다 더 크고 대단하게 보이고 싶어한다. 키가 작은 자는 신발을 높이고 머리 카락을 세우기도 하며, 명함에 수 많은 명칭을 총 망라하기도 한다.

동물의 눈을 보면 먹거리가 식물인지 혹은 육식 포식자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사슴이나 비둘기의 눈과 사자나 독수리의 눈이 그렇게나 다른 것이다. 사람도 육식을 많이 하는 이들이 대체로 사납고 무서우며 건강에도 유익하지 못한 점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식물 열매와 석청, 혹은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리만 먹는다면 좀 더 부드럽고 선한 성품으로 변할 것이라 생각된다.

요한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도록 길을 터 준 선지자로서 회개를 외쳤는데,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사역을 시작한 셈이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눅1:41-44) 그는 최후의 나실인 답게 광야로 나가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 모양의 열매와 석청을 취하여 자신의 순백한 영성을 유지하면서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외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인 자신에 만족하였다. (롬12:3) 에서 "-----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였다. 동물 세계에서는 크게 보이려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겠으나,영적인 사람의 세계에선 잠시는 이득이 있겠지만, 마침내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 로 종결된다.

세례 요한은 상황으로 볼 때에 아주 커 보일 수 있는 때를 만났다. 4백여 년 동안이나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애타게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내가 바로 그 니라” 비슷한 말만 해 버리면 엘리야보다 더 크고 높은 존재로 살 수도 있을 법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혹은 그 이하로 표현하였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요1:23) 자신은 그저 단순한 <소리> 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메시야 이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눅7:28) 하셨다. 겨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한 자가 인간 가운데 가장 큰 자라니, 바로 이런 겸손이 예수님으로부터 존귀함을 받는 비결인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몸집을 더욱 크게 보이라고 말하지만, 거짓된 자아의 거품을 제거하지 못하면 진실된 자아를 자신조차 종래 볼 수 없다. 진실된 자아를 바로 알게 될 때에야 오직 은혜로 받은 높은 자존감을 갖고 살 수 있으며, 현실에서 자신이 아무리 낮아져도 비굴해지지 않으며 두렵지도 않게 된다. 스스로를 과대 평가하여 포장하는 것이 동물들은 죽지 않으려는 본능에서라면, 사람은 돈과 명예를 사려고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큰 자> 는 스스로를 겸손히 평가하고 낮출 그 때 별도로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존귀함을 받는 자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걸었던 그 길은 비록 좁지만 우리 모두가 따를 수 있는 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가 <소명으로 받은 소리> 가 있는데, 그 볼륨을 요한처럼 잘 절제하여 조절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역시 존귀히 여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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