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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본령 (本領)


한 재벌 기업의 회장이 고급 승용차의 뒷자리에 눈을 감은 채 깊숙이 앉아 회사의 정문을 통과한다.

이 소유자의 모습은 마치 제왕의 모습이며 자태이다. 이러한 제왕 같은 소유자의 속내는 어떤 것일까?

이 큰 재산을 어떻게 계속 유지보존하고 더 확장시켜 나갈것인가? 그러나 이같은 미래에 대한 욕망보다 현실적인 문제가 더 많다. 자사제품에 대한 시장의 평판이 낮고 풀질개선을 위한 설비개량 비용도 없다. 경쟁사의 출현으로 제품시장은 잠식되고, 노사간의 문제도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기업가로서의 사회적 성가(聲價)도 저조하고, 재벌 소유자로서의 번민이 많다. 이러한 회장이 정문을 통과하여 지나갈 때 회사 정문의 수위(守衛)는 재빨리 나가서 정문 차단기를 올려주고, 다시 들어와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회장은 태평스러운 수위가 부럽고, 그렇게 한가로이 태평스러운 수위는 제왕과 같은 자태의 회장이 부럽다. 과연 그들은 서로를 부러워 할 수 있는 것일까?

독일의 사회심리학자요 철학자인 “에릭흐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제목의 글은 어느 한쪽을 버려야 하는 결단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문제를 제기한 본인은 그 답을 주지 않고 있다. 소유가 어떻고 존재가 어떻다고 하는 논술은 늘어놓았지만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택할 것인 지는 말이없다.

희랍의 철학자 쏘크라테스는 “자신을 알라”고 하였지만 어떻게 자신을 발견하고 아는 지는 답을 주지 못하였다. 그의 대답은 “나는,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을, 내가 알고있다”는 것이 그의 답이다” 라고 한것과 같은 맥락이다. 성경은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13:5). 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눅12:15) 고 하였다. “소유냐 존재냐”의 문제가 아니라 절제의 문제인 것을 알수있다.

나는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 까지는 지금의 나이, 87세가 되기까지 새벽기도회를 거른 일이 없다.

새벽기도를 드리는 것은,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 최상의 제사성이 있는 신앙의 덕목이라는 것이 나의 신앙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로 지친 몸을 어딘가에 무책임하게 버리다시피 내어던지고 밤에 숨만 내쉬고 들이킨 것 뿐인데 “밤이 되니 아침이 되니라”하는 사이에 그렇게 망가지고 오염되었던 세상이 새로이 재창조되어 우리 앞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나는 매일 아침, 이 천혜(天惠) 싱그러움과 정적(靜寂)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새벽 잠을 버리고 교회에 간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그 첫 시간을 주님께 드리고 세상 말을 지껄이지 아니한 혀(舌)로 기도하고 찬송하며, 세상의 것을 생각지 아니한 마음으로 주님께 자신을 고백하고 소박한 소원을 아뢴다.

이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Pal Pak의 Broad Ave에 다다르면 의례 청소차를 만나게 된다. 청소차 양쪽 뒤에는 연록(軟綠) 색의 자켓을 입은 두 청소부가 매달려 가게 앞에 내어놓은 무거운 쓰레기통을 번쩍 들어 올려 차에 붓고, 또 5-6 미터 간격으로 그렇게 반복적으로 쓰레기를 치운다. 얼마나 힘들까, 냄새는 말할 것도 없고,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직업도 아니며, 남 보기에도 천하고, 그렇다고 이 일을 계속하여 무슨 자랑스러운 승진의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청소차가 도로 변에 있는 커피집 앞에 이르면 향기로운 커피 향이 취각을 자극한다. “저 냄새는 나도 좋아하는 냄새 아닌가!?”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 추구의 권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행복을 어디에서 찾는가? 소유냐 존재냐를 추구할 여지를 어디서 찾느냐? 쓰레기 차의 뒤에 매달려가며 쓰레기를 치우는 한 청소부는 탄식한다. “아! 나는 이게 무어냐!? 에이 이놈의 세상...! 행복을 어디서 찾으며 내 가족들의 행복한 모습을 어디서 찾느냐, 탄식한다. 그러나 한 쪽 청소부는 똑 같은 일을 하면서도, 쓰레기 통을 들어 올리는 순간마다, 이 일이 끝나면 받은 돈으로 Pizza 한 판과 커피 4잔 팩을 사가지고 집에 가서 기다리는 가족과 만날, 포근한 까치둥지 안의 행복을 설계한다. 행복의 본령은 마땅히 생각할 더 이상의 것을 생각지 않고(롬12:3) 자족의 다스림에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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