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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


많은 성도들이 구약에서 표현된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아주 다른 분 같다는 생각에서 마치 신약의 하나님을 택하는 듯이 보인다. 나는 이 문제를 학문적으로 짧게 설명할 능력이 부족하므로 신 구약의 실 저자이며,신약의 시작이신 예수님이 직접 구약에 대해 하신 한 말씀만을 인용해 보려 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다. 율법의 완성을 보려면, 율법을 알고 실천해야 한다는 뜻인데, 마치 수학을 제대로 배우려면 구구단은 반드시 암기해야 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는 일이다. 사거리마다 높이 달려있는 신호등을 보면서 이를 악 물고 부들 부들 떨면서 법규를 지키는 운전자가 어디 있는가. 잘 적응이 된 도시인들은 어렵지 않게 신호등의 법규를 지켜 나가는 것이다. 이렇듯 율법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연스럽게 지키면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 유대교는 이미 오신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직 율법 속에만 머무르고 있고, 카톨릭은 형식을 강조하다가 중심의 노른자가 숨이 막혀 썩으면서 핵심을 잃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는 그와 반대로 율법을 거의 폐하려 들어 껍질에 구멍이 생겨서 복음의 본질이 몹시 훼손되어 위기 상황에 이르렀다. <말씀> 께서 말씀하신다 구약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신다고. 까다롭고 무섭게 보이던 구약의 하나님이 갑자기 무골호인처럼 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을 십자가의 제물로 희생시키고 보니 인류를 더욱 사랑하게 되셔서,구원의 폭을 더 넓게 하시고 더 인내하고 기다리실 뿐, 그 엄위하신 하나님의 속성은 전혀 달라진 것이 아니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한 자는 계산기 없이 수퍼에 가기조차 어렵듯이 구약을 모르면 재림 예수께서 심판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공의성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구약은 외면해도 된다는 식의 신앙은 몹시 위험하다는 뜻이다. ** 히브리서는 구약과 신약의 가교 역할을 하는 중요한 성경인데, 그 유명한 믿음장이라 불리우는 11장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11:1) 라고 전제한 다음 그 믿음의 모델 되는 분들의 이름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고 아벨로 시작하여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를 열거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는 12장에서 <그 믿음의 주>를 예수님이라고 말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히12:2) 이 두 귀절은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이 동일 하시며 믿음도 같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결국 분명하게 다른 점이란 구약 시대엔 지성소에 대제사장 혼자서 그 것도 겨우 일년에 한번 하나님을 대면하러 들어 간 것과 신약 시대에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누구든 언제든 성소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엄청난 은혜의 차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10:19-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넓혀 주시고 단 한번의 거듭남으로 주신 구원 조차 짧디 짧은 수 십년의 삶 가운데서 두렵고 떨림으로 이 구원을 보존하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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