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구호가 넘치는 시대, 되찾아야 하는대림절의 의미
- timusa3

- 4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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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식 발행인
도무지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조국 대한민국의 분열을 바라보면 마음이 무겁다. 광장과 거리, 온라인 공간마다 날카로운 말과 폭력적인 구호가 난무하고, 서로를 향한 혐오와 정죄가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소리의 구호가 아니라, '영적 거룩함과 자기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영성이다. 성탄과 새해를 앞두고 분주함이 우리의 모든 시간을 집어삼키는 이 시기에, 우리는 오히려 성숙한 대림절을 제대로 맞이하고 지키자는 부름앞에 서야한다.
당초 근대 국가의 핵심 개념인 ‘주권’은 결코 중립적인 정치 이론이 아니었다. 주권은 귀족과 교회 같은 중간 집단의 초월성을 제한하기 위해, 절대군주와 근대 국가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였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붙들고 씨름했던 질문은 분명했다. “어떻게 폭력을 멈출 수 있을까? 어떻게 국가의 붕괴를 막을 수 있을까?” 끊임없는 내전과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국가의 질서와 존립을 지켜낼 방법을 모색했다. 그가 보기에 문제의 근원은 ‘중간 단체들’이었다. 공동체, 교회, 귀족, 다양한 결사체들이 저마다 초월적 권위를 주장하며 부딪히고 충돌할 때, 싸움은 멈추지 않았고 국가는 끊임없이 위태로웠다. 이 끝없는 대립을 제압하고, 이들의 초월성을 제한하는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주권’이라는 개념이다. 주권은 모든 갈등을 끝낼 수 있는 힘이고 법 위에 서 있는 초법적 파워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간 공동체들이 누리던 ‘자기만의 시간’, 곧 국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초월적시간 역시 박탈당했다. 시간마저 국가의 틀 안에 편입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회력(Church Year)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교회력은 단순한 종교행사 일정표가 아니다. 교회가 교회력을 만든 이유는, 그저 ‘행사 날짜를 기념하고 정리하려고’가 아니었다. 교회는 시간을 독자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교회력을 만들었다. 국가의 지배를 받지 않고, 국가를 초월하여 시간을 자기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교회력은 “우리는 국가의 필요를 위해 소모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간 안에 사는 공동체”라는 '영적·정치적 선언'이었다. 교회력은 공동체를 지켜 국가에 희생당하지 않겠다는 결단이자, 나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의지였다.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버린 채 교회력을 ‘소비’하고 있다는 데 있다. 교회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단지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중심으로 한 이벤트 캘린더 정도로 취급하는 순간, 교회와 신앙은 순식간에 자본과 마케팅의 노예가 된다. 성탄은 선물과 세일, 연말 파티로 대체되고, 부활절은 계절 행사나 가족 나들이용 기념일로 축소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시간을 누가 지배하고 있는지, 내가 지금 누구의 시간 속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영적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교회는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의 시간 안에 살 것인가? 국가의 시간, 자본의 시간, 이념의 시간을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시간을 살 것인가?”
대림절은 바로 이 질문을 새롭게 던지는 시간의 혁명이다. 대림절은 성탄준비 행사기간이 아니다. 분열과 폭력이 언어가 된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백성들이 침묵하고, 기다리고, 회개하고, 소망을 붙드는 시간이다. 바쁜 연말 일정 속에서 더 많은 모임과 더 화려한 행사를 집어넣는 계절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지금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를 되묻는 계절이다.
폭력적 구호가 난무하는 시대, 분열이 상식이 되어버린 조국과 뉴욕의 교계를 바라보며 나누고싶다. 시간의 주권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 드리자, 그 속에서 거룩함과 깊은 성찰의 영성을 회복하자.
올해 대림절, 우리의 예배와 일상, 가정과 교회 공동체의 시간을 다시 정렬해 보자. 국가도, 자본도, 이념도 아닌, 오직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주인이신 시간으로.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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