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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염려되는 신문고의 주관적 보도 - 증거제출 ‘못한 것’과 ‘안한 것’의 차이 인식해야

정보의 홍수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이 범하기 쉬운 치명적인 실수 가운데 하나는 정답을 알아가는 과정의 중요함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정보를 접할 때 읽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저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정답이라고 단정을 내린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에서 행여 잘못 전달된 정보는 특정인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최근 발행된 신문고(2019, 4월호. 제34호)의 기사에 의하면 미주기독교방송국 이사장 윤세웅 목사와 이승진 목사의 불륜 건과 관련한 명예훼손 및 손해배상 청구 건과 관련해 신문고가 일방적으로 승리한 것으로 보도됐다. 즉 이는 윤세웅 목사와 이승진 목사의 간통 사건이 확연한 사실이라는 뉘앙스가 그대로 묻어 나오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본보는 공개적으로 오픈된 법원 판결문에 기초해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닌 사실에 대해 보다 폭 넓게 인식해야 하는 상황들에 대해 알리며 나아가 불륜 상대라고 주장하고 있는 이승진 목사에 대한 내용도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심하게 덪칠 된 부분에 대해 바로 잡아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나아가 교계와 한인사회가 반성의 기회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편집자 주)

1. KCBN (미주기독교방송국) 윤세웅 목사 관련 건

먼저 판결문은 신문고 김수환 대표가 윤세웅 목사의 불륜 관련 사실을 지난 2015년 6월 20일 부터 2016년 10월 26일, 2017년 4월 4일, 2017년 8월 1일 등 4차례에 걸쳐 공표하고 이를 배포했다고 밝히고 피고 김수환씨가 변호사 선임없이 출석하지 않아 궐석재판 판결을 앞두고 있었고 이에 원고 윤세웅 목사는 명예훼손 및 100만 불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법원 판결문 사본 1>

기독교방송국 윤세웅 목사와 김수환 대표에 대한 법원의 판결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먼저 윤세웅 이사장의 불륜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신문고 김수환 대표는 윤세웅 목사의 불륜행위가 진실이기에 명예훼손이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 진실을 입증하는데 실패했다고 밝히고 있다. 즉 김수환 대표가 윤세웅 목사의 불륜행위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것이 법원의 입장이다. 이 부분은 명백하고 치명적인 김수환씨의 실수이며 신문고의 오보이다.

<법원 판결문 사본 2>

그리고 윤세웅 목사의 명예훼손으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 건 역시 윤세웅 목사 본인이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는 부분에 대해 본인의 사업이나 전문성에 직접적인 피해가 있는지에 대해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명예훼손을 이유로 경제적 손해 배상을 받기 위해서는 경제적 손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증거로 뒷받침 되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피해의 규모에 대해 입증하지 못했다는 것이 판결의 요지이다. 기독교방송국 차원이나 윤세웅 박사가 운영하는 병원 차원에서 이같은 법적인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또 다른 문제이기에 윤세웅 목사는 이 부분에서 다소 소극적 자세로 임하지 않았나 생각되는 대목이다. 오히려 손해배상 청구가 아닌 명예훼손 만으로 사건을 몰고 나갔으면 충분히 승소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이다.

법원 판결문에는 관련된 판례들이 구체적으로 명시됐다. 이상이 법원의 판결 내용의 골자이다.

이 부분에서 원고나 피고측은 본인들의 입장에서 각자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본 판결에 의하면 신문고와 김수환 대표에 대한 법원의 일방적 무죄 선포가 아니라 김수환 대표를 상대로 한 윤세웅 목사의 명예훼손과 손해배상 청구 부분에 대해 법원이 기각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 판결은 현실적으로 윤세웅 목사가 보유하고 있는 재산상의 규모가 월등함에도 불구하고 김수환씨를 향한 다소 무리가 되는 비현실적인 손해배상 청구라는 점에서 재판부가 김수환 씨의 입장을 고려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약자와 열악한 언론사의 손을 들어주는 관례에 따른 판결이라 하겠다. 현재 윤세웅 목사는 항소를 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이다.

2. 이승진 목사 관련 허위사실 유포는 심각한 인권 유린

본 사건은 ‘이승진 목사가 음주를 하고 비틀거렸다’는 익명의 제보가 발단이 돼서 윤세웅 이사장과의 불륜관계로 까지 비화된 그야말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내용으로 gossip거리로 삼기에도 민망한 내용들로 벌써 몇해 째 약방의 감초처럼 신문고의 단골 기사가 된 상태이다.

자유론으로 유명한 J.S.밀은 “일반화된 진리는 이미 그 속에 오류를 내포한다”는 말을 한 바 있다.

아무리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인정하는 사실(진리)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 속에서 소화된 자기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이미 사실(진리)로써의 가치성을 상실한다는 점을 간파하여 한 말로 볼 수가 있겠다. 이 점은 바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제1의 가치라고 할 수 있으며 아무리 강조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문제이다. 이것이 본 기독저널이 이승진 목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배경이 된 것이다.

먼저 본 기사에 대한 본보의 입장은 일부 철없고 비겁하고 게다가 분별없는 자들을 통하여, 확실하지도 않은, 아니 전혀 사실과 무관한 윤세웅, 이승진 목사의 애정 행각(이미 법원에서 증거를 제출하지 못한 것으로 무죄 판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과 나아가 목사이기 이전에 한 여인의 사생활까지 전혀 사실과 무관한 내용에 너덜 너덜하게 덪칠을 입혀 그야말로 세인들의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고 있는 듯해 인간적인 안타까움을 넘어 지나치고 그치지 않는 언론의 월권행태가 염려되는 것이다.

자신들의 ‘바램’을 기정 사실화하고, 그러한 ‘변질된 사실’을 진실인양 ‘왜곡보도’하는 행태!

언제부터 언론이 이렇게 시건방지게 노는 쪽으로 변했는가.

신문고는 본 사건이 법원에서 제보자들의 제보에 의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즉 자의적이고 고의적이 아니라는 말이고 법원 역시 그렇게 인식하고 신문고의 손을 들어 준 것으로 안다.

문제는 이 즈음에서 멈췄어야 했다. 만일 그랬다면 신문고는 말 그대로 신문고의 본연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고 오히려 칭찬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기각이라는 판결이 긴장을 풀어지게 한 것일까?

분명 불륜에 대한 증거를 제출하지 못한 것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재편집이라는 형태로 기사화 한 것은 당사자들에 대한 언론사의 자세가 아닐 뿐더러 자신의 위상(?)에도 결정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추구하는 목회철학과 소신으로 무장된 여성 목회자로서 사회적 정의와 목회적 양심 앞에서는 바른 기준으로 접근하는 목회자임을 이미 뉴욕교계에서 중진 목회자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며 본 기자 역시 수개월째 경험을 통해 이승진 목사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것이다.

현재 이승진 목사에 대한 한인교계와 한인사회의 행태는 조폭들이 벌이는 짓과 다를 바 없다. 대명천지에 이런 비겁한 행태가 난무하면 안된다. 한 개인의 죄목을 치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편이 아님에 대한 반목, 법조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집단의 편견에 의한 재단, 자기들과는 다름에 대한 처절한 질투가 이곳 미국 땅, 한인사회에서 버젓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더우기 안타까운 점은 이같은 한 여성 목회자의 인격이 짓밟히고 있는 상황에서 신문고에 단골로 등장하는 목사들 몇명이나 맘 조리며 자기들의 앞가림에 열중하고 있을 뿐 어느 누구하나 이같은 잘못된 내용에 대해 지적을 하거나 꾸중을 하는 자가 없다는 점이다.

행사 때마다 짙은 화장으로 면피 세우기에 여념이 없는 그 잘난 여성 목사들은 대체 뭘하고 있는 건가 묻고 싶다. 목회자로서 가져야 하는 예언자적 사명의식과 책임의식은 차제하고라도 그 흔하디 흔한 동료의식 조차도 없는 그대들은 도무지 부끄러움조차도 모르는 자들인가?

있는 자와 가진 자들에 대한 단순한 증오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 작금의 이승진 목사 관련 보도이고,

지금 그 시민 재판정에 끌려나온 장본인이 본 칼럼에서 안타까이 여기는 이승진 목사이다.

본보와 기자가 알고 있는 이승진 목사는 철없는 애들 표현대로 우리가 만만하게 씹다가 버릴 껌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인과는 상관이 없는 죄(?)와 윤세웅 목사를 압박하기 위한 협박용으로 한 여인을 지금 우리 사회와 교계가 침묵과 방관으로 난도질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증오에 가득 찬 죽창으로 윤세웅 목사에게 보란 듯이 말이다. 대체 언제 쯤 이런 광란이 끝이 날 것이며 언제까지 교계는 침묵으로 일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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